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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21. <부정공>학생공휘재현묘표(學生公諱在賢墓表)
1. 문헌 목록 〉19. 19世 〉23. <부정공>양지헌공휘재근행장(養志軒公諱諱載根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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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선호처사공휘재원묘표(仙湖處士公諱在源墓表)
仙湖處士公諱在源墓表 寅錫謹閱家藏壬子譜當時校勘是仙湖處士諱在源其博雅可想矣及讀公程文賻儀等薦筆勢鬯茂其才氣可推矣竊聽鄕邦輿論至今徃徃稱公爲吉人長書其德行可驗矣噫聞某處有人焉可以爲師範則不遠而願見之自是恆性而况余得之宗黨之近乎但輩行差後不及拜床請敎誠其昏砭其惰而倀倀焉困於無聞獲親有道無亦命也歟雖然公沒後歲才三章制行次第無由得以詳所可徵者惟公儀容莊嚴性度寬仁蚤業功令詞翰噪場屋事親甚得歡心居憂恫疊禍幾至滅性朔望哭墓風雨莫沮友諸弟飢飽與同中罹鬱攸遺籍恢大加憾傷曰吾家文獻從此百六耶遂留意聚書而未果此其平日庸言庸行之梗槩也何其僅僅也然幸出於當時見聞之所及執此爲據安且城三字不患其無有第傳所謂君子不出家而成敎於國非弟慈乎然則公之一生務本可推類於此又以文華而但命與時窮未之成名耳世或以士無奇異激烈之稱忘加軒輊者何足與議於斯哉公士行世家玉川忠獻公諱元吉典農副正諱瑜議麗季國初顯祖副正公恥食二粟南遯順天之富有縣表閭祀鄕聲烈甚遠孫而相好亭諱諱智崙官察訪曾孫而直長諱穩俱名行推重其後以連三世上舍生有儒門淵源仙川進士諱維元一也仙川下曰耘禮曰文溥曰秉國寔公曾祖禰諱妣全義李氏肇其考同胞者四公爲長生正宗乙巳享年七十七春秋至 哲宗壬戌十二月二十九日臯復凡三娶元驪興閔氏墓祔次南原尹氏慶州鄭氏葬各異兆五男女中錫尹氏出景錫俊錫以錫居昌愼錫祚妻鄭氏出景錫系叔父在濟后內外孫曾不盡名淇善君以二房生爲中錫子者也間嘗謂余曰維本面鳳頭山下十二川之村左枕癸原我先大父攸藏而家賓不能具咫尺之石至於事行記錄尙闕下肖是悼願爲之撰述而傳之安知不倘嗣是而有刻耶嗚呼吾文之傳不傳雖不敢知竟於公身後事若辭非其人則孰謂余曾有所高景也謹叙而告之曰此昇平近古隱德萬年幽宅過之者庶知余言之非阿私而式之也夫 族姪 寅錫 謹書 선호처사공휘재원묘표(仙湖處士公諱在源墓表) 인석(寅錫)이 삼가 집에 모신 임자보(壬子譜)를 열람하니, 당시 교정(校正)이 이 선호 처사 휘 재원(在源)이라 공의 박식유아(博識儒雅)함을 가히 상상 할 수 있고, 공의 정문(程文) 부의편(賦義篇)을 읽어보니, 필력(筆力)이 쭉쭉 뻗어서 무성하니 그 재기(才氣)를 가히 미루어 알겠으며, 내가 향방 여론을 들으니 지금까지 가는데마다 공을 길인장자(吉人長者)라 칭도하니 그 덕행을 가히 증험 하겠도다. 아! 아무곳에 사람이 있어 가히 사범이 될 만한 분이라는 말을 들으면 멀다 아니하고 보기를 원한 것이 스스로 항성(恒性)인데 하물며 내가 가까운 종당일까 보냐, 다만 연배와 항열의 고하가 있어 자리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여 그 어둠을 밝히고 게으름을 일으키지 못하며, 길잡이를 잃고 외로이 서서분견(聞見)이 없으니 친함을 얻는거도 길이 있는 것인가 또한 운수가 없는 것인가, 공이 별세하신 뒤에 해가 겨우 세번 밝았으나 제행(制行) 차제를 상세히 얻어 들을 수 없고 하기 증빙할 바는 오직 공의 의공(儀容)이 장엄(莊嚴)하고, 성도(性度)가 관인(寬仁)하여 일찍 공명(功名)을 힘써 문장이 과장을 떠들석 하게 하였고, 어버이를 섬기며 심히 환심을 얻었으며, 상제때에 가화(家禍)가 중첩할까 근심하여 거의 명의 끊어진 지경에 이르러 풍우가 심할 때에도 삭망에 반드시 묘소에 곡하였으며, 모든 아우와 우애하여 배부르고 주점을 함께 하였다. 중년에 화재를 당하여 유적(遺籍)이 다 재가되니 크게 슬퍼하며 가로되 우리집 문헌이 이처럼 재액(災厄)을 당하는가 하고 마침내 뜻을 두고 글을 모았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것이 그 평일에 떳떳한 언행의 줄거리니, 어찌 그리 근근(僅僅)하였던고, 그러나 다행이 당시의 견문에 따라 이를 가지고 증거하니 안 차성(安且城)석자로 그 있고 없음을 근심하지 아니하였도다. 또 전(傳)에 이른 바 군자가 출가(出家)치 아니하고 나라에 교화를 이룬것이 효제자(孝弟慈)가 아니겠는가 그런즉 공의 일생에 힘쓴 근본을 미루어 알겠으며, 또 문장으로써 빛을 이루웠으나 다만 운명이 때와 함께 궁하여 이름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상에 혹 선비가 기이하고 격렬(激烈)한 칭호가 없는 것으로써 망녕되게 우렬(優劣)을 더한자는 어찌 족히 이에 더불어 의논 하겠는가. 공의 자는 사행(士行)이요, 옥천인 인데 전농부정 휘 유(典農副正諱瑜)의 후예로 고조는 선천진사 휘 유원(仙川進士諱維元)이요, 운예(耘禮)·문부(文溥)·병국(秉國)이 공의 증조니(曾祖禰)며, 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조(肇)의 녀(女)였다. 四형제 중의 거장하고 정종(正宗) 을사(一七八五)년에 출생하여 철종(哲宗) 壬戌(一八六二)년 十二월 二十九일에 향년 七十八세로 별세하고, 무릇 三취(三娶)하였는데 원배 여흥 민씨(元配驪興閔氏)는 부장(祔葬)하고 다음 남원 윤씨(南原尹氏) 경주정씨(慶州鄭氏)는 각각 다른 곳에 장사하였다. 자녀는 五남녀인데 중석(中錫)은 윤씨 출이요 경석(景錫)·준석(俊錫)·이석(以錫)거창(居昌)신 석조(愼錫祚)의 처(妻)는 정씨출인데 경석(景錫)은 숙부 재제(在濟)의 후사로 출계하였고 내외 손증은 다 기록치 아니한다. 기 선군(淇善君)이 二방생으로써 중석(中錫)의 아들인데 일찌기 나에게 말하되 오직 본면 봉두산하 열두냇 마을 왼편 계원(鳳頭山下十二川之村左枕癸原)은 나의 선대부 유택인데 집이 가난하여 능히 석의(石儀)를 갖추지 못하고, 사행(事行)의 기록 또한 없어 불초가 이를 슬퍼하니, 원컨대 가려 기술하여 전하면 어찌 혹 이를 이어 각명(刻銘)이 있지 않을지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슬프다. 내 글이 비록 전하고 전치 않할 것을 내가 비록 알지 못하나 마침내 공의 신후사(身後事)를 만일 그 사람이 아니라 하여 사절한다면 누가 나를 높고 밝은바 있다고 이르겠는가? 삼가 서술하여 고하되 이는 승평근고 은덕(昇平近古隱德)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니 지나는 자는 모두 나의 이 말이 사사로이 아첨한 것이 아닌 줄 알고 공숙하게 허리를 구부릴 진저. 족질(族姪) 인석(寅錫)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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